후원하기 참여하기 나의이야기
나의이야기
휴먼아시아와 함께 인권의 빛을 밝혀주시는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2020.05.05

나의 이야기 - 임사라 후원이사님

나의 이야기 작성자: 임사라 안녕하세요. 법무법인 재현에서 현재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임사라입니다. 휴먼아시아는 현재 휴먼아시아 대표를 맡고 계신 서창록 교수님과의 오랜 인연이 계기가 되어 후원이사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학부 때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는데요. 대학교 4학년 때 참석한 학회에서 우연한 기회로 서 교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로스쿨 재학 시절, UN인권모의재판대회에 참가자로 참석했다가 서 교수님을 또 다시 만나뵙게 되었고, 그 인연을 이어가다 작년부터 휴먼아시아 후원이사로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서 교수님을 알게 된 해에 휴먼아시아도 창립되었으니, 어쩌면 휴먼아시아와 저의 인연은 휴먼아시아가 태동될 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휴먼아시아 활동 중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청소년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권 교육' 입니다. 현재 당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도 물론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이러한 도움이 지속될 수 있도록 미래의 주역들에게 인권 감수성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당장 눈에 띄는 효과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무척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많은 인권 단체들이 특정 이슈에 집중해 활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일회성에 그치는 봉사나 지원 활동은 실제적인 인권 개선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합니다. 휴먼아시아는 흙을 다져 나무를 심고 꽃이 필 때까지 끊임 없이 관심을 기울이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당장 세간의 이목을 끄는 이슈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관심의 끈을 놓치 않고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는 휴먼아시아의 모습을 보면, 후원이사로서 보람과 사명을 더욱 느끼게 됩니다. 후원이사는 말 그대로 한 발짝 물러나 작은 '후원'의 힘을 보태는 것 뿐이고, 휴먼아시아 멤버분들이 휴먼아시아가 이어나가는 모든 큰 일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분들의 정성과 노력이 있기에 제가 보태는 미미한 후원도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빛에 동참하셔서, 휴먼아시아가 누군가에게 더 큰 힘이 되어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20.05.05

나의 이야기 - 김민우 이사님

나의 이야기 작성자: 김민우 휴먼아시아에서 여러 분과 뜻 깊은 만남을 가지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이 곳에 함께 하는 모든 분들이 항상 건강하고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아름다운 숲 길을, 시간이 멈춘 듯한 평화로운 호숫가 둘레길을, 산새들이 시냇물 소리에 맞춰 자유롭게 노래하는 상쾌한 산길을 걷기 좋아하는 김민우라고 합니다. 저는 현재 고려대학교 인권센터에서 인권 연구□교육실의 연구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누구에게나 인생의 한 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어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따뜻한 말 한마디 따뜻한 손길 한번이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삶이 참으로 존중받고 있다는 평안함을 주는 큰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모인 모든 분들은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따뜻한 인권적 마인드를 가진 분들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인권관련 정책연구를 진행하면서 특히 관심의 가지고 있는 분야는 『기업과 인권』입니다. 현대인의 일상 자체가 기업활동과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기업은 우리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다양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저는 휴먼아시아 『아시아 기업과 인권센터』를 통해 앞으로 기업과 사회가 사람을 생각하며 보다 나은 미래사회를 함께 열어 갈 수 있는 상생의 길을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항상 제자리를 지키며 아시아 각국의 인권현장에서,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고 땀 흘리려 온 휴먼아시아의 헌신과 열정을 그간 저는 보아 왔습니다. 특히 휴먼아시아 청소년 인권프로그램 강의에 직접 참여하며 사람의 소중함과 가치를 깨닫고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이 곳에 바로 미래의 희망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휴먼아시아 가족의 일원으로 저도 함께 할 수 있게 돼서 기쁘고 또한 감사합니다.

2020.04.28

나의 이야기 - 수르야 데바 고문님

나의 이야기 작성자: 수르야 데바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UN 인권·다국적기업 실무그룹의 멤버이자 홍콩 시티대학교 법과 대학 부교수로 일하고 있는 수르야 데바입니다. 저는 기업과 인권, 인도-중국 헌법 및 지속 가능한 발전 연구에 관심이 있고 관련 논문을 많이 발표했습니다. 또한 기업과 인권을 위해 일하는 UN기구, 정부기관, 다국적 기업 및 시민단체들의 고문자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업과 인권 저널의 창립 편집장 중 한 명이며 네덜란드 Quarterly of Human Rights, 비엔나 국제헌법 저널, 인도 헌법 저널 및 호주 인권 저널의 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국제 모의 UN 인권이사회 UPR 같은 휴먼아시아의 미래 인재 양성 프로그램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휴먼아시아가 주최하는 인권 포럼에서 많은 이해관계자들과 인권 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하고 토론할 수 있는 것도 아주 좋았어요.저는 기업 인권 피해자를 위한 효과적인 구제 수단 조사, 성별이 기업 활동에 주는 영향, 기후 변화 완화, Belt and Road Initiative (BRI) 를 향한 인도적인 접근 등을 주의 깊게 보고 있습니다.모두의 인권을 실현하기 위해선 인권보호를 믿는 개개인과 기관들이 같이 협력하며 힘쓰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20.04.23

나의 이야기 - 조수아님

나의 이야기 작성자: 조수아 안녕하세요, 스탠포드 대학교 2학년 조수아라고 합니다. 현재 미국에서 저는 심리학과와 예술을 복수전공하고 있습니다. 휴먼아시아와는 중학교 때 학교 동아리를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되어 아시아 인권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제대로 접하게 되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캠페인 활동, 모의유엔 인권UPR 대회, 인권스쿨 등을 통해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와 인권문제의 복잡함과 중요함을 배워 나갔습니다. 고등학교 때 휴먼아시아를 통해 인도 차크마 족 스네하 학교을 위한 컬러링북 프로젝트를 하면서 인권과 영어공부가 가능한 컬러링북을 직접 제작하고 색연필을 지원받아 기증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저만의 만족을 위한 작품을 만드는 데에 그쳤다면, 휴먼아시아와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제가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직접적,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래에 예술이나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은 저로서는 이 경험이 굉장히 소중하게 다가왔고, 앞으로도 저의 능력으로 필요한 곳에 꿈과 웃음을 주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느껴지는 인권을 보장받는 현실이, 다른 곳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휴먼아시아는 그런 곳들을 직접 찾아가 인간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들을 다시 찾아주고 일궈내는 NGO 입니다. 저는 휴먼아시아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일으켜주는 세상에 대한 희망과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항상 묵묵하고 조용히 더 나은 세상을 빚어내는 휴먼아시아 분들, 휴먼아시아와 함께 하고 계시거나 함께 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020.04.19

나의 이야기 - 박범진 고문님

나의 이야기 작성자: 박범진 저는 대학 졸업 후 언론에서 15년, 중소기업에서 10년,정치활동으로 15년을 보낸 뒤 15년전부터는 북한인권시민연합에 참여하여 북한인권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005년 서강대에서 열린 북한인권 난민국제회의에 참석해서 북한의 인권실태를 알게 되면서 북한인권 개선을 위해 조그만 힘이나마 보태야겠다는 생각에서 북한인권시민연합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그동안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3년 전부터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휴먼아시아의 고문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휴먼아시아 이사장인 서창록 교수와의 인연 때문이었습니다.2006년 북한인권시민연합이 자매단체로 아시아인권센터를 창립할 때 북한인권시민연합 고문과 이사 대부분이 창립회원으로 참여했습니다.그 때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였던 서창록 교수는 아시아인권센터 부소장을 맡았습니다. 아시아인권센터는 서창록 교수가 이사장을 맡으면서 휴먼아시아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휴먼아시아가 북한 이외에 아시아 지역으로 인권운동의 시야를 넓혀 인권옹호활동을 하게 된 것은 대단히 뜻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제2차 세개대전 이후 독립한 140여개 국가중에서 유일하게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을 동시에 이룩한 나라입니다.건국 이후 오랜 권위주의 시대를 겪으면서 국민인권에 많은 제약이 있었던 때가 있었으나 이제는 어느 정도 인권 선진국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인권문제에서 앞서가는 나라가 된 만큼 다른 나라의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휴먼아시아의 회원이 되어 주십시오.

2020.04.15

나의 이야기 - 김영완 상임이사

나의 이야기 작성자: 김영완 저는 한국외국어대학교 LD 학부 교수 김영완입니다.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국제개발협력을 세부전공으로 하고 있습니다. 국가 간의 공적개발원조, 국제기구와 비정부기구의 국제개발협력 활동 등을 연구고 있는 연구자입니다. 휴먼아시아는 2013년 미국에서 돌아와 고려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할시 대표이신 서창록 교수님을 통해서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인권 관련 한국 NGO가 많지 않고 활동이 쉽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었던지라 유난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휴먼아시아의 활동이 인권과 더불어 국제 구호 활동을 포함하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휴먼아시아의 발전을 위해서 감사로 일을 하게 되었고 감사 업무로 인하여 휴먼아시아의 활동을 보다 자세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휴먼아시아가 나아가야할 길에 대해서 보다 깊게 고민하게 되었으며, 휴먼아시아가 진행하는 인권과 국제개발협력 분야의 활동에 힘을 보태고자 2020년 상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상임이사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휴먼아시아에서 활동을 하면서 국제개발 현장 발굴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라오스의 비전 스쿨 현장 발굴과 필리핀 민도로 섬 현장 발굴에 기여를 하였습니다. 현장에서 아이들의 웃음 소리를 들었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낄 수 있었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휴먼아시아는 투명한 경영을 통해서 인권에 기반한 국제개발협력을 진행하고 인권 옹호 활동을 하는 진정성 있는 NGO입니다. 이제 비전 2030을 통해서 양적인 성장과 질적인 성찰을 이루어내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께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2020.04.08

나의 이야기 - 권소미 이사

나의 이야기 작성자: 권소미 안녕하세요? 휴먼아시아에서 2015년부터 3년간 사무국장을 지내고, 현재는 휴먼아시아의 이사로 활동중인 권소미입니다. 휴먼아시아는 독특한 색깔이 있는 인권단체입니다. 규모가 작지만 사업내용이 매우 다양합니다. 사실 인권은 굉장히 포괄적이고도 광범위한 분야라, 인권단체라고 하면 대상이 누구냐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인권은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권리이기에 인권의 대상을 한정짓기는 참 힘듧니다. 또한, 휴먼아시아는 ‘인권’과 ‘교육’을 함께 접목시킨 독특한 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휴먼아시아의 대표님의 직업이 교수이기 때문에 단체의 방향성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는 그러한 점이 휴먼아시아만이 가진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인권 증진을 도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권의 대상을 포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점이 그러한 것입니다. 또한, 인권교육을 중점적으로 하는 단체들과 다른 점은 인권교육활동가를 길러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재풀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권을 교육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교육의 방식이 옹호 활동 뿐만 아니라 실제 인권 침해가 되는 계층을 찾아 도와주는 일까지도 휴먼아시아가 펼치고 있는 사업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한 분야에 특화되어 있는 인권단체를 찾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지만, 이렇게 다양한 분야를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인권단체는 극히 드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무자로 일을 하면서 이러한 독특한 매력을 가진 휴먼아시아의 사업들을 하나하나 실행해 나가면서 휴먼아시아가 아시아지역의 인권활동을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비전이 실현되기를 꿈꿔왔기에 지금까지도 애정이 샘솟는 것 같습니다.인권이 무엇인지, 어떻게 존중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에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시기가 청소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미 정립되어진 가치관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청소년기에 다양한 유형의 인권 사례와 교육을 접하게 된다면 인권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휴먼아시아가 포커스를 두는 인권 감수성 함양입니다. 인권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시간이 걸리면서 내재되어 지는 감성입니다. 휴먼아시아의 청소년 인권 교육 사업이야말로 인권의 빛을 서서히 밝히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청소년들 스스로가 인권 동아리를 만들어 인권에 대한 공부를 하고, 이를 옹호 활동으로 연결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보며 기특하면서도 사업의 보람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난민에 대해 막연하게 알고 있던 지식의 퍼즐 조각을 휴먼아시아를 통해 하나의 큰 그림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난민에 대한 지식적 input이 생길 뿐만 아니라 난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먼 훗날 성인이 되었을때 이러한 인권취약계층을 바라보는 시선은 현재 어른들이 바라보는 시선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고 이로 인해 변화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휴먼아시아에서 일하면서 두번째로 보람있었던 사업은 바로 인도에 체류한 난민아동 교육 사업입니다. 이 사업을 진행하면서 제 스스로가 차별받는 입장에 처해 보기도 하면서 어려움이 많았던 사업이였습니다. 실제 그들이 겪는 차별적 정책을 함께 느끼면서 사업을 했는데, 보통 이런 경우라면 사업의 지속성 때문에 사업 선정 대상에서 제외되기 마련입니다. 국제개발협력 사업이라는 것이 늘 사업의 지속성에 대한 평가가 큰 부분을 차지하기에 이러한 잣대로부터 제외되는 지역과 대상은 사업대상에서 제외되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그 당시 휴먼아시아는 이러한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끊어보고자 하는 동기도 컸던 사업입니다. 사업 대상 지역으로 가는 길도 험난하거니와 파트너 기관의 열악한 사정으로 사업 이행이 물 흐르듯 쉬운 사업은 아니였으나, 당시 사업에 참여한 휴먼아시아 직원들, 인권 교육 전문가, 현지 선생님, 학부모, 학생들의 열정으로 3년을 이어갔습니다. 이후 휴먼아시아의 사업에 참여했던 선생님들이 교육의 기회가 닿지 않는 지역에 다시 학교를 설립하고 휴먼아시아에서 진행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학교를 운영해 가는 모습은 휴먼아시아가 인권 증진의 허브역할을 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국제개발협렵에서 요구하는 사업의 성공여부를 재는 수치를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업은 아니였으나, 단순히 물리적 여건을 마련해 주는 ‘giving’의 의미를 넘어 지역사회에 인권친화적 교육을 확장시켰다는 데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앞으로 이 지역이 이러한 선순환을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고, 휴먼아시아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을 통해 도움을 주기를 바랍니다. 휴먼아시아가 하는 사업은 다양하지만, 규모가 작은 단체입니다. 해야 할 일이 많지만, 재원이 늘 부족합니다. 사업을 수행할 인력도 그리고 자금도 늘 부족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마음을 아프게 하는 영상 또는 사연에 기부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 물질적인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가 생기지 않기 위한 제도적 장치나 인식의 변화도 역시 필요합니다. 이는 휴먼아시아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시아 지역의 인권 교육의 허브가 된다면, 인권침해가 가장 많이 일어나고 있는 아시아 지역의 인권 상황을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몇년 후에 그리고 나아가 몇십년 후에 개선할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휴먼아시아의 사업에 시민들의 많은 관심과 기부와 참여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또한, 열정과 책임감으로 휴먼아시아를 이끌어가는 임직원 모두 자부심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모두가 자랑스러운 휴먼아시아의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2015.05.27

나의 이야기 - 김원희 동시통역사

프로보노는 ‘공익을 위하여’라는 뜻의 라틴어 ‘Pro bono publico’의 줄임말이다. 원래의 의미는 전문적인 지식이나 서비스를 공익 차원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것을 말하는데, 법조계에서는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무보수로 변론이나 자문을 해 주는 봉사활동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요즘은 그 의미가 확대되어 ‘재능기부’라는 말과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다. 아시아인권센터에서 뛰어난 언어실력으로 포로보노 활동을 하고 계시는 동시통역사 김원희 씨(위 사진)와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2011년 6월 23일 작성글) Q1. 안녕하세요? 이번 아시아인권센터(현 휴먼아시아) 임시 총회 때 감사패를 받으셨는데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먼저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사실 저로서는 상당히 부끄러운 자리였습니다. 제가 해드린 건 아무것도 없는데 좋은 일에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에너지를 쏟고 계신 많은 분들 앞에서 감사패를 받으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좋은 인연을 계속 이어가자는 격려로 알고 앞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부족하지만 열심히 돕겠습니다. Q2. 동시통역사로서 가지고 계신 언어 능력을 기부하시고 계시는데, 이런 생각을 언제, 그리고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다면 말씀해주세요. 북한인권시민연합을 위해 통역봉사를 하고 계시는 선배님의 소개로 이 일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통역대학원을 갓 졸업한 상태였는데 대학원에서 저를 가르치셨던 강사 분 중 한 분께서 아시아인권센터 포럼과 청소년 워크샵을 소개해 주셨어요. 그 후론 저를 비롯한 많은 선배, 동기, 후배 여러분께서 함께 도와주시고 계십니다. Q3. 동시통역사로서 ‘프로보노’ 활동에서 얻으시는 보람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의사라면 사정상 병원을 쉽게 찾지 못하는 분들에게 다가가 건강을 챙겨드릴 수 있을 것이고, 변호사라면 형편이 어렵지만 법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하는 일은 이렇게 위대하지도 못하고 참으로 보잘 것 없긴 하지만, 그래도 제가 가진 기술로 좋은 뜻에 함께하고, 그로 말미암아 조금이라도 남을 도울 수 있다면 미천하지만 제가 가진 능력을 나누는 게 저로서도 행복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Q4. 혹시 동시통역사로서의 기부활동 중 어려움이나 고민이 있으신가요? 김원희 님과 같이 재능을 기부하고픈 분들께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글쎄요. 동시통역사로서 기부활동에 특별한 어려움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굳이 하나를 꼽자면 자료 확보를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사실 기부활동에 있어서 어려움이라기보다는 통역사로서 자주 접하는 어려움입니다만, 통역할 행사의 발표 자료가 미리 확보되면 통역사들이 준비하기 훨씬 수월하거든요. 굉장히 잘 챙겨주시지만 간혹 포럼이나 워크숍 발표 또는 강연 때 쓰실 최종자료가 미리 확보되지 않아 준비가 조금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Q5. 기부를 ‘대가 없는 나눔’이라고 본다면, 우리가 실생활에서 기부 받고 있는 것도 여러 가지 있을 것 같습니다. 김원희 님께서는 어떠한 기부를 받고 계신가요? 생각해보면 굉장히 많을 텐데 받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는지 막상 예를 들려니 어렵네요. 몇 년 전에 어머니께서 빙판길에 미끄러지셔서 팔을 크게 다치시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지셔서 일상생활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시지만, 완전히 원상 복귀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걸 아직도 기억하시는 이웃이나 주변 친지 분들께서 김장 하실 때마다 늘 저희에게 나눠주세요. 한창 팔이 편찮으셨을 때는 제가 집에 없을 때 대신 운전해주셔서 어머니께서 가셔야 하는 곳에 함께 가주시는 분들 많으셨고요. 그런 것도 다 일종의 기부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노력과 정성을 나누어 주셨으니까요. Q6.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베풀고 싶지만, 막연해 주저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격려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재능을 기부하고 싶은 사람에게 어려움이 있다면 첫 걸음을 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도움을 주고 싶고 나눌 수 있는 재능이 있지만, 시작을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제가 이 일을 찾아 나선 게 아니라 소개를 받은 터라 이런 조언을 해드릴 자격이 없는 지도 모르지만,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면 재능을 나눌 곳과 함께 할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고 생각합니다. 부끄러워 마시고 자신의 재능을 알리고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보세요. 알고 보면 봉사와 기부는 생각보다 훨씬 뿌듯하고 본인이 배우고 얻는 게 많아지는 일입니다.

2015.05.27

나의 이야기 - 조의환 자문위원

매년 개최되어 온 아시아인권포럼은 휴먼아시아에서 실시하는 주요활동 중 하나입니다. 2006년 이후 아시아인권포럼은 각계각층의 인권전문가들이 모여 아시아의 인권문제를 짚어보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토론의 장으로써 자리매김하게 되었는데요. 매번 눈을 사로잡는 디자인의 포스터를 통해 저희의 활동을 성공적으로 이끌도록 힘써주신 든든한 조력자 한 분이 계십니다. 이번에는 저희 단체의 리플렛과 활동보고서를 디자인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번 달 Hurasia는 시각 디자인 협회 이사이시며 사진작가이신 조의환 대표를 만나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2013년 8월 9일 작성글) 1. 우선 휴먼아시아에 많은 도움을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 드립니다. 1954년 경북 김천 출신으로 삼형제의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렸고 김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하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그래픽디자인을,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에서 사진디자인,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에서 신문출판디자인을 전공했습니다. 1976년 육군소위로 임관, 보병 소대장, 육군본부 제병지휘부 등을 거쳐 1976년 중위로 소집해제된 ROTC 14기 출신입니다. 1978년 LG애드 광고디자이너를 시작으로 1980년부터는 출판, 잡지, 신문 등 줄곧 인쇄매체에서 편집디자이너로, 잡지 편집장, 신문 편집위원, 디자인연구소장으로 일했습니다. 2007년 퇴사 후 디자인54라는 디자인 스튜디오를 만들었고 평생 디자인 현장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2011년 오랫동안 계획했던 사진 전시회를 열고 사진집을 출간하며 사진가로 데뷔했습니다. 2. 오랫동안 조선일보에서 일을 해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조선일보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었고 저희 단체와 처음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나요? 1984년 조선일보 출판국에 입사 ‘월간조선’ 리디자인을 비롯해 ‘가정조선’ 창간, 여성지 ‘FEEL’ 편집장, 출판국 미술부장, 편집국 편집위원, 조선일보 디자인연구소장을 거쳤습니다. 주로 잡지, 신문, 출판의 편집디자인이 주 업무였고 그박에 조선일보가 기획한 대형 전시, ‘아! 고구려’, ‘대한민국 건국50주년 특별기획전 우리들의 이야기’,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6.25 50주년 특별기획전’, ‘이승은 허헌선인형전 엄마 어렸을적엔…’ 등의 전시 기획자로 일했습니다. 1998년 조선일보의 가로쓰기 리디자인을 총괄하는 아트디렉션하면서 현재 조선일보 지면에 쓰이는 가로쓰기 전용활자 개발을 주도했습니다. 사단법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이 첫 국제회의를 열 때 조선일보와 인연을 맺으며 당시 행사관련 디자인과 진행에 대한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큰 뜻을 펼치시는 여러분들의 울림이 가슴에 다가와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자연스럽게 휴먼아시아와도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3. 올해 아시아 인권포럼 포스터에 실린 사진은 상당히 이색적이었습니다. 함축된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은데요. 특별히 포스터의 사진을 고른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 사진을 통해 전달하시고픈 메시지가 무엇인가요? 그 사진은 사실 저의 첫 개인전에 발표하려고 준비해 둔 미발표 작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전시회에 발표하기 전에 미리 포스터에 사용한 것이지요. 마치 인골과 같은 느낌이 드는데 사실 이 오브제는 오랜 시간 바다를 떠돌며 갈리고 깎인 작은 나무토막입니다. 오랜 세월 파도에 쓸려 다니며 본래 나무의 형태는 사라졌지만 제 눈에 띄어 사진 작품의 주인공이 도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 작업을 시간에 대한 해석이라고 말합니다. 땅이라는 고향을 떠나 오랜 시간 바다를 방황하고 정처 없이 떠돌다 낯선 해안에 상륙한 나무토막을 보는 순간 표류, 난민, 보트피플, 윤회 등의 단어를 연상하게 되었습니다. 제주도 해변을 3년여 돌아다니며 수집한 이 작은 나무토막을 사진으로 만들어 지난 4월19일부터 5월18일까지 FLUX라는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4. 이번엔 저희 휴먼아시아 포스터뿐만 아니라 활동보고서와 리플릿까지 도움을 주시게 되었습니다. 작업을 하시는 데 있어서 특별히 주안점을 두시는 부분이 있을까요? 저는 장식적이고 화려한 디자인보다는 간결한 디자인을 좋아합니다. 매체 디자인을 오래한 때문인지 몰라도 군더더기를 없애 명쾌한 전달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에 신경을 씁니다. 디자인이 너무 과하면 오히려 디자인만 눈에 띄고 본질이 묻히게 되므로 전달에 오류가 생기지 않도록 가급적 노이즈를 없애는 데 주력합니다. 그리도 적은 비용으로 제작할 수 있도록 고민합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 덤덤하거나 타이포그래피 중심의 디자인이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5. 혹시 앞으로 휴먼아시아와 함께 하시고픈 작업이나 프로젝트가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능할지 모르지만 사진으로 아시아 지역 소수민족을 기록하는 일을 한 번 해 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직장에 메여있어서 여행을 자주 할 수 없었지만 사실 약간 역마살이 있거든요.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진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꿈꿔 본 영역입니다. 인권 상황을 알리고 협력을 구하고 조력자를 설득하는 데는 강력한 표현 매체인 사진이 활용도가 매우 높습니다. 6. 그동안 저희와 같은 사회단체에 재능 기부를 해오시면서 많은 어려움과 보람을 느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또 그와 반대로 보람을 느끼신 순간이 있으셨다면 언제였는지 말씀해주세요. 사실 따지고 보면 재능기부란 말이 나오기도 전부터 재능기부를 해 온 격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데는 약간의 편안함이 있어서 오래 가는 모양입니다. 어차피 비즈니스가 아니기 때문에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거든요, 과장하면 하고 맘껏 해 볼 수 있다는 여유로움과 편안함이 있지요. 이래라 저래라 하면 서로 짜증나고 억만금을 준데도 다시는 하기 싫거든요. 기부한다는데 누가 괴롭히지 않잖습니까. 함께 자원봉사를 하시는 분들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시곤 하지요, 그 때 정말 보람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이제는 저보다 아주 많이 젊은 분들과 일을 하게 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너무들 어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하기야 삼촌이나 아버지뻘이 되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하고 싶은 말을 머뭇거리며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냥 나이 먹은 오라버니나 막내 삼촌처럼 편안하게 대하시면 저도 좋은데… 그러기엔 너무 연식이 오래된 것 같습니다.

2013.02.08

나의 이야기 - 김용수 (네팔 봉사활동 후기)

1월 18일 새벽 5시에 3시간 전쯤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고 알람 소리를 듣고도 잠시 누워있던 나는 곧 무기력하게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일어나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전날 대충 챙겨놓은 짐들과 장비를 다시 한번 체크 하고, 집을 나와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에서도 기절하듯 다시 눈을 감았다. 몇 분 정도 지난 듯 느껴졌지만, 어느새 공항에 도착해 있었고, 잠시 후 이번 휴먼아시아 네팔 봉사 단원들과 만나게 되었다. 정신없이 티켓팅을 끝낸 뒤에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 모를 아침을 먹고 비행기에 탑승하니 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그 순간 나는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묘한 감정 속에 들어와 있었다. 6시간 정도 지나고 네팔에 도착해 가장 느낀 것은 카트만두의 탁한 공기. 그리고 공항을 나오면서 보았던 각자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은 많은 수의 새까만 눈동자들이었다. 네팔은 이제껏 살면서 가본 어느 나라보다 가장 이국적이고 가장 흥미로운 첫인상을 선물해 주었다. 나는 카트만두 외곽지역에 버티켈이라는 지역에서 봉사활동과 촬영을 했는데 그곳에서 KBCC라는 아동센터를 운영하시는 권선교사님과의 만나 봉사활동 전에 이곳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때 나는 이곳에 직접 오기 전에 머릿속으로 그리고 혼자 생각했던 콘티와 이야기 전개들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날 밤 조금 전 느꼈던 감정 그대로를 이번 다큐멘터리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버티켈에 사는 아이의 집에서 했던 홈스테이는. 미약하게나마 그들의 삶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느끼게 해준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메즈, 라메즈 뻐허리라는 우리 집 아이들은 6살 9살이었고 두 아이 모두 영어는 잘 못하고 수줍음을 많이 탔기 때문에 속 깊은 대화는 하지 못했지만 그 아이들의 눈빛과 삶의 방식에서 내 삶의 가장 큰 부분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이제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날아올랐을 때 나는 네팔로 오는 비행기에서 처음 느꼈던 감정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해방감이었다. 네팔에 오기 전 몇 년간 한번 제대로 쉬어보지도 못하고 앞으로만 달려가며 살아가며 지칠 대로 지쳐있던 나의 삶에서의 해방. 그리고 그 해방은 곧 네팔에서의 여러 소중한 기억들과 감정들로 채워져 뭐라 말할 수 없는 벅찬 감정으로 가슴속에 자리 잡았다. 여행이 아닌 봉사. 그리고 그들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촬영과 홈스테이. 히말라야가 안고 있는 네팔이란 나라는 나에게 스스로 삶을 돌아볼 기회와 다신 잊지 못할 따뜻한 기억을 선물해 주었다. 돌아온 지 2주가 지난 오늘, 언젠간 다시 돌아갈 날을 그려본다.이렇게 말하며. 나마스떼!

2013.02.08

나의 이야기 - 김형석 (네팔 봉사활동 후기)

내 인생에서 가장 짧은 8일이 아니었나 싶다. 8일이라는 시간 안에 타 문화를 접해서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막상 만나는 순간부터 언어라는 장벽 말고는 다른 어려움은 느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외로 봉사를 나가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나에게 특별했다. 그리고 네팔로 가는 비행기에서부터 우연히 만난 여행 가이드 한 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네팔에 대한걸 많이 알게 되었다. 왕권 체제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화폐 제도도 가장 늦게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들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들은 어떤지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통계상으로는 제일 빈곤한 나라 중 하나이며 사람들이 발전하려는 욕구가 별로 없다고 말하였고 사회가 조금 더 도전적이고 진취적으로 변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숙소로 가는 길에는 대통령이 6개월마다 바뀌게 되어 대통령들이 혜택만 누리고 자리에서 나오게 된다는 설명도 듣게 되었다. 한 사람의 의견이기도 했지만 내가 생활해온 남미의 경우에도 비슷한 경우가 많아서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물론 어린이들에게 직접적인 해당사항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있는 동안 추가로 얻은 네팔에 대한 지식들을 염두에 두면서 활동할 수 있었다. 다른 봉사활동과 달랐던 점은 홈스테이를 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옆에서 보기만 하는 문화 체험이 아닌 그들과 한 집, 한 방에서 먹고 자고 어울리면서 그들의 삶을 짧게나마 몸소 느낄 수 있었던 것 이였다. 홈스테이하는 동안 같이 있는 시간이 길었던 만큼 서로 배우고 알아가는데 수월했고 봉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 중 하나인 이해에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을 주민 분들께서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감사했고 아이들도 친형 인마냥 잘 따르고 좋아해줘서 고마웠다. 식사는 그들과 함께 손으로 양념을 섞어가며 먹고, 해질녘쯤엔 재주와 끼가 넘치는 아이들과 베어링이라는 놀이 기구를 타며 놀고, 밤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 노래 부르며 캠프파이어를 하며 어울린 기억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아이들과 마을 분들에게서 나오는 진심과 앳된 미소를 보면서 조금 덜 가졌더라도 행복하고 인간다운 면을 더 지니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떠나던 날 하던 일이 늦어져 하룻밤을 함께 보냈던 조띠 가족과 주변에 사시던 마을 분들께 인사도 제대로 못한 아쉬움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아쉬운 만큼 다시 참가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새로운 문화에 대해 배워가며 동시에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흔치 않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의미 있는 활동을 해보자는 취지에서 참여를 하게 되었는데 매우 만족스러웠고 봉사를 하러 왔다가 오히려 내가 더 많은 것을 받아가는 것 같다. 이런 기회를 제공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2013.02.08

나의 이야기 - 조은지 (네팔 봉사활동 후기)

처음 네팔에 가기 전까지 나에게 해외봉사는 그저 막연한 기대감만 주었다. 거기에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 네팔로 향했다. 네팔에 도착해서 내가 보고 마주했던 것들은 한껏 들떠있었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물론 처음에는 전깃줄에 매달려지나가는 원숭이를 보고 신이 나 있기도 했었다. 하지만 골목길로 접어들고 문과 창문이 제대로 달리지 않은 네팔의 집과 거리들을 보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가벼웠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사람에게 집은 아늑하고 안전한 보금자리이지만 네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최소한의 것들조차 보장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공항에 도착하고 내가 느낀 네팔의 첫인상은 ‘무서움’이었다. 네팔에 가기 전에 들었던 무성한 소문들이 떠오르며 내 안에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이러한 불안감을 가지고 아이들이 있는 버디켈 아동센터에 첫 발을 들였다. 하지만 겁먹었던 내 생각과는 달리 그 곳에서 나를 맞이해준 사람들은 ‘순수’ 그 자체였다. 어른들은 친절했고, 아이들은 사랑스러웠다. 깨끗하게, 배부르게 지낼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내 마음까지 정화시켜주는 아이들의 웃음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내 이름을 가르쳐준 다음부터 내가 보이면 멀리서 뛰어오면서 어설픈 발음으로 내 이름을 부르던 아이들을 잊을 수 없다. 내 옆구리를 찌르며 ‘미스’하고 부르던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네팔의 미래이자 우리의 미래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이러한 환한 웃음 뒤에 아이들이 처한 상황은 심각했다. 제대로 된 샤워나 목욕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칫솔조차 없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아이들의 청결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홈스테이로 하루동안 묶었던 집의 세 아이들은 감기를 항상 달고 사는 듯 했다. 항상 코를 훌쩍거리며 기침을 하면서도 제대로 된 두꺼운 외투하나 걸치지 않은 아이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한번은 아이들과 동네청소를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같이 간 단원들끼리만 시작한 청소였는데 한아이가 우리가 청소하는 것을 보자 금세 흥미를 보이더니 쓰레기를 주워왔다. 그 아이에게 엄지를 들어 보여주니 다른 아이들도 함께 쓰레기를 줍기 시작했다. 우리가 해주는 작은 칭찬들이 그 아이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 같다. 쓰레기를 다 줍고 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아동센터 안으로 들어가 비누로 손을 씻겨 주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던 아이들이 나중에는 조금 더 씻겨달라고도 했다. 아이들과 향긋한 냄새가 나는 손 냄새를 맡으며 한참을 장난을 치고 놀았다. 그 아이들의 순수함과 천진함이 그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아이들을 지켜주고 있는 것 같았다. 네팔에 가 있는 동안 우리 봉사단원들은 밤마다 한 방에 모여 아이들에게 줄 펜에 꽃 장식을 했다. 네팔 아이들은 집에 펜이나 종이를 가지고 있는 아이가 드물었기때문에 아이들에게 펜을 예쁘게 꾸며서 한 자루 씩 주고 싶었다. 봉사단원들은 낮에 아이들에게 수업을 하고 나서 모두들 목이 쉬고, 피곤했지만 새벽 12시, 1시까지 아이들에게 펜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밤마다 모여 펜을 장식했다. 처음엔 서툴렀던 바느질이 어느새 능숙해지고, 처음에는 실의 매듭도 짓지 못했던 오빠들마저 바느질의 달인이 되어있었다. 그 시간이 그 당시에는 졸립고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기 때문에 네팔에서의 시간을 좀 더 많이 느끼고, 한국에 돌아온 지금 추억 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진 것 같다. 네팔에서의 일주일은 이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순간이 되었다. 가기 전까지 네팔 봉사활동이 나에게 이렇게 큰 변화를 줄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 네팔에서 느꼈던 감동과 추억들은 앞으로 내가 나아갈 길에 대한 좀 더 명확한 나침반이 돼주고 있다. 앞으로 어느 곳에 가서도 이 소중한 일주일동안 느꼈던 것들을 다시 느끼긴 힘들 것 같아 이번 봉사활동은 내게 의미가 더 크다. 앞으로 나에게 다시 기회가 온다면 꼭 네팔로 해외봉사를 가서 아이들의 가슴 따듯해지는 웃음을 한 번 더 보고 싶다.

2012.12.27

나의 이야기 - 한국외국어대학교 08학번 정세라

대학에 들어와서 초등학교 방과후 영어교실봉사도 한 학기 해보고 사회봉사과목을 들으며 발달장애아이들의 체험학습을 돕는 봉사활동 등도 해보았지만 Asia의 인권을 돕는 단체에서 봉사를 하게 된 것은 정말 의미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국가차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이러한 아시아 인권관련 활동들을 진행하는 단체를 알게 되어 새로웠고, 평소 간간히 기부하는 단체에서도 해외를 돕는 분야가 있었는데 그 동안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 이 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한영 번역업무는 나에겐 전혀 생소한 분야였지만 처음엔 걱정이던 것이 오히려 이제는 영한번역뿐 아니라 한영 번역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되었다. 늘 배우는 게 더 많고 얻어가는 게 더 많은 기분이다. 회의 때마다 항상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신 대표님과 친절하고 아름다우신 간사님 새로 오신 분까지 모두 훈훈하고 다정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단체이다. 그런 만큼 앞으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나마 응원하겠습니다. J

2012.12.27

나의 이야기 - 한국외국어대학교 08학번 장민지

처음 휴먼아시아에 배정을 받았을 때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번역을 해본 경험도 많지 않고 영어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번역을 하면서도 막히는 부분이 많아서 힘들었지만 많이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영어 공부만 된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난민문제에 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또 한국에서도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사실 처음에 영한 번역인 줄 알고 자원했다가 한영 번역인 것을 알고 멘붕이 왔습니다. 번역을 하면서도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서 힘들었습니다. 특히 인권 쪽으로 배경지식이 부족하여서 번역을 하면서도 지금 잘 하고 있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규선 간사님께서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주신다고 하셔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번역을 했던 것이 좋은 경험이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 수업이 끝나더라도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도울 수 있게 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간사님들을 포함하여 휴먼아시아 관계자 분들께서 너무 잘 배려해주셔서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2012.12.07

나의 이야기 – 한국외국어대학교 07학번 김민지

일단 번역 봉사활동을 마치고 처음으로 든 생각은…“아.. 아직 내 번역 실력이 많이 부족하고나.”와 “더 공부해야겠구나” 였습니다.처음 휴먼아시아 활동보고서를 읽어보고 휴먼아시아라는 단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알게 된 후에는 이런 곳에서 번역 업무를 도와서 할 수 있다는 것이 왠지 뿌듯하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습니다. 홈페이지에서 다양한 활동 소식을 읽어보면서 이런 기회가 아니었으면 아마 평생 알지 못했을 사실들도 알게 되었고 (인권문제 및 난민 문제 관련하여) 저보다 나이 어린 학생들이 여러 활동을 통해 인권 문제를 알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나는 그 동안 무얼 하고 살았나 반성도 해보게 되었습니다.저에게는 생소한 로힝기야 난민들 문제도 이번 기회를 통해 알 수 있었고, 제 부전공이 국제학인 만큼 다른 국제적인 이슈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아시아 지역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더욱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번역 업무 관련하여서는 사실 쉬웠던 적이 없었지만 매주 번역문을 제출하면서 ‘나름’ 즐겁게 봉사활동을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너무도 친절하신 휴먼아시아 간사님들(esp. 정규선 님) 덕분에 좋은 경험 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1 2